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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믿을 수 없는 영 모집인들이 화관>에는 풀잎, 이소, 풀잎의 남자친구 무섭이 등장한다. ⓒ<믿을 수 없는 영화관> 갈무리



1월 초 서울 용산구 한강진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집회 대오에서 빠져나와 역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한 중년 여성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의 손에는 내가 참여했던 집회 우리저축은행 의 피켓과는 정반대의 구호가 인쇄된 유인물이 들려 있었다. 얕은 긴장감이 맴돌던 중, 대뜸 그녀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여기 천국 가는 길 맞아요?” 천국이라니? 당황한 내가 “천국이요?” 하고 되묻자, 답답하다는 듯이 한 글자씩 힘주어 말했다. “청구 가는 길이냐고요.”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청구를 천국으로 잘못 들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자 그녀도 무직자빠른대출 깔깔 웃었다. 청구역으로 가는 지하철 승강장을 알려주고 나서, 나와 그녀는 서로의 얼어붙은 손과 발을 내보이며 염려와 격려를 나눴다. 그런 후엔 각자의 승강장으로 흩어지며 작별 인사도 했다.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봐요.”


광장에 마주 선 반대편 대오의 시민을 보며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저 언제든지전화해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서 사는 걸까?’ 그들이 보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이며, 어떤 신념을 품고 있기에 저편에 서 있는 걸까. 그녀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우리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만나 갑작스럽게 연결되었다. 어쩌면 이해란 원래 그런 것일까? 영영 불가능한 것도, 항상 가능한 것도 아닌 무엇. 고장 난 전선에 전기 빌라 전세대출 가 흐르듯, 잠깐 동안 우연하게 이어지는 것 말이다. 이토록 살벌한 정국에 반대편 대오의 사람과 만나 서로 걱정과 응원을 나누는 귀갓길이라니, 돌이켜봐도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한강진역에서의 장면이 불현듯 떠오른 건, 만화 〈믿을 수 없는 영화관〉 때문이다. 이 만화에도 믿을 수 없는 순간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영화관 티켓 부스에서 근무하던 ‘풀잎’과 보일러 상담원 ‘이소’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풀잎은 영사기사였다. 영사실은 좁은 데다 시끄럽고 답답하기까지 했지만, 사람이 북적한 로비를 지나 영사실 문을 열 때면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풀잎은 영사실의 문을 밀고 들어가는 그 순간을 꽤 좋아했다. 풀잎은 오래전부터 다른 세계를 꿈꿨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젠간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늘 다른 세계의 문을 밀어젖히기를 고대해왔다. 그래서였을까. 풀잎이 그토록 원하던 다른 세계에 건너간 것도 그녀가 영화관의 문을 활짝 제친 순간이었다.


다른 세계에 건너간 풀잎의 눈앞에는 새파란 바다가 펼쳐진다. 늘 영화관 바깥에 서 있던 건물과 자동차, 복잡한 골목들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다. 풀잎이 일하는 영화관은 마치 바다 위에 고립된 섬처럼 둥둥 떠 있다. 사방을 돌아봐도 온통 바다뿐인, 완전히 다른 세계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바다로 뛰어들 순 없으니, 풀잎은 여전히 영화관 안에 갇혀 있다. 영화관 유니폼을 입고, 티켓 박스에 서서 이전의 세계에서 영화관에 들어오는 관객들을 맞이한다. 하는 수 없이 영화관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그러던 중, 여러 관객 가운데 ‘이소’가 풀잎에게 말을 건다. 이소는 풀잎에게 음료를 선물하고, 쿠키를 나눠 먹는다. 대화를 하던 중 풀잎은 이소에게 “제자리를 찾”기 위해 “다른 세계로 넘어가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순수하게, 그러나 확신에 찬 얼굴로 또박또박 전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든 놀라거나 당황할 법하건만, 이소는 풀잎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감탄한다.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후 이소는 풀잎이 다른 세계로 갑작스레 건너오는 바람에 미처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풀잎의 남자친구 ‘무섭’과의 마지막 만남도 주선해준다. 무섭은 풀잎을 보지 못하고, 풀잎도 무섭을 보지 못하지만, 그 가운데에 이소가 서서 서로의 말을 전해준다. 사실 풀잎의 남자친구 ’무섭’은 풀잎과 함께하는 순간이야말로 인생의 클라이맥스라 여기고, 풀잎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어쩐지 무섭의 노력은 번번이 빗나가고야 말았다. 매번 커피를 찾기에 풀잎이 그걸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던 무섭은 “다른 건 몰라도 매일 따뜻한 커피 한잔을 꼭 내려줄게” 약속했지만, 정작 풀잎이 원한 건 신선한 딸기를 잔뜩 넣고 갈아 만든 생딸기 스무디였다. 알고 보니 매번 풀잎은 돈이 모자라 밥 대신 커피를 마셨을 뿐, 커피를 썩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3년을 같이 살았지만, 무섭은 풀잎을 잘 모른다. 아마 풀잎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기억을 사탕처럼 입에 물고

이소의 지극한 노력으로 마지막 대화를 마친 무섭과 풀잎은 이소와 함께 영화관 테라스에 나란히 선다. 이소와 무섭은 도시의 전경을, 풀잎은 새파란 바다를 응시한다. 이소는 문득 이렇게 말한다. 나도 네가 보는 바다를 보고 싶다고.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이제 이소도 풀잎을 보지 못한다. 풀잎은 영화관 바깥의 세계로 성큼 길을 떠나고, 이소와 무섭은 자신의 일상을 조금씩 바꾸며 각자 일상을 헤엄쳐나간다.


“희망이 없어도 절망하지 않기. 덕분에 이제 전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어요.” 풀잎이 떠난 후, 이소가 풀잎을 회상하며 하는 말이다. 이 짧은 문장을 여러 번 읽자니 눈물이 났다. 아마 내가 한강진역에서 만났던 그 여성을 다시 만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그 짤막한 대화의 순간을 희망이라 말하며 붙잡기엔, 맞부딪치는 갈등의 규모도 너무나 크다. 그럼에도 이런 순간을 떠올리자면 어쩐지 힘이 난다. 작중 대사처럼, 이런 기억들은 ”영원히 녹지 않는 사탕”인 것만 같다.


얼마 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린이들이 희망이라고, 생각 없이 건넨 말에 아이는 이런 대답을 돌려주었다. “엄마, 선생님이 노력 없는 희망은 없댔어. 노력하는 사람이 희망이야. 어린이여서 다 희망인 건 아니고, 어른이어서 다 희망이 아닌 것도 아니야.” 말투는 다정했지만, 뒤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쩌면 희망이 없다는 건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도리어 변화의 신호탄이자 노력의 계기인 건 아닐까.


풀잎이 떠난 자리에서 이소와 무섭은 자기 일상의 모습을 바꾸어나간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지만, 풀잎과의 기억을 사탕처럼 입에 물고 용기 내 자신의 세계를 항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소소한 이해와 대화의 기억을 그러모아 사탕처럼 입에 물고, 희망 없이도 절망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바다를 담담히 항해해나가는 것. 그러다 보면 변화는 이미 문밖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조경숙 (만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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